2014년 3월 1일 토요일

"난해한 예술을 위한 변명" : 박종빈, 박재평(DVOXAC) <전야> — 아르코가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 시리즈

2014/02/20. 8 pm
아르코미술관 스페이스 필록스

by 함스타

공연사진 http://dvoxac.blog.me/50189822185

독일의 문예학자 페터 뷔츠는 드라마 속 시간의 핵심을 ‘긴장’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영화나 연극에서 느끼는 이러한 긴장을 흔히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이것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지를 기다릴 때 생기는 ‘기대’나 ‘예감’에 가깝다.


태풍이 오기 전날 저녁, 어디 나갈 수도 없이 집 안에만 머무르는 시간, 사람들은 태풍을 기다린다. 어린 시절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이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을 맞닥뜨리는 장면을 마음 졸여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 '불안'이라고 해야 할까. 세계의 모든 것들이 그 흔들림만으로 위태로운 시간. 그 흔한 새 한마리, 굉이 한 마리도 뵈지 않는 주택가의 거리. 풍경들의 쓸쓸함과,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는 대상을 기다리는 긴 지루함, 그리고 마음 속에 또아리 트는 불안을 박종빈, 박재평(DVOXAC)의 <전야>는 그려낸다.





공연은 화이트 큐브에서 이루어졌다. 아르코 미술관 스페이스 필록스에 들어가면, 비닐로 만든 천막 같은 공간 안에 긴 직사각형의 테이블이 있고, 그 테이블의 삼면에 관객들이 앉는다. 테이블 위에는 부러진 선풍기, 쟁반 위의 수많은 와인 병들, 널브러져 있는 형광등, 꽃과 화분 등 집안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물건들이 놓여 있다. 막 늘어놓은 것 같지만 결코 막 늘어놓지 않은 정제된 모습으로.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사람도 있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한 여자. 공연과 전시의 경계에 선 작품인 만큼 시각적인 요소들만으로도 눈을 끄는 ‘무대’였다.

두 개의 프로젝터가 관객들이 마주하는 벽에 두 개의 스크린을 쏘아서 영상을 보여준다. 남산이 보이는 서울의 어느 주택가. 그곳에 사는 한 커플. 왜 그랬을까, 흑백으로 촬영된 이 도시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왕자웨이 감독의 <중경삼림>을 떠올린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도 보이고, 날이 맑았더라면 길거리를 배회했을 작은 고양이들도 보인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커플의 모습도 보인다.



스틸 컷을 나열하듯, 언뜻 서로 연관이 없는 듯한 장면들이 나왔다가 사라진다. 그러다 공연의 어느 한 시점에서, 테이블 위에 누워있던 여자의 숨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물이 떨어지고 조명이 어지럽게 명멸하면서, 여자가 일어난다. 일어나서, 걸어 나간다. 여자가 나간 뒤 얼마간 영상은 계속된다. 뒤집어진 새가 심장을 펄떡거리는 장면, 누군가의 맨발이 숲속을 헤치고 달려가는 장면 등이 보인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순간에, 공연은 끝난다.

공연의 끝을 알리는 조명의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박수를 친 것도 아니고, 그렇게 ‘그냥’ 공연이 끝난다. 관객들 중 일부는 끝의 순간을 예민하게 감지하고는 박수를 치려다가 주변의 반응을 살피고, 일부는 아직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거나, 일어나려고 채비를 하는 옆 사람에게 의문스러운 눈빛을 던진다. 그렇다. 우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고, (물론 아주 희박한 확률로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태풍은 무사히 지나갈 것이고, 그 때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거대한 운명의 물줄기가 아닌,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거기 흘러가는 일상일 테다.

주섬주섬 내려놓았던 가방과 코트를 챙겨서 미술관을 나서면서 뒷맛이 씁쓸하다. 무대 미술이나 영상 모두 감각적이라고 느껴졌고,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30분이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명석하지 않았다. 내러티브가 없어서, 혹은 장면들의 개연성이 없어서 명석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이 ‘작품으로써’ 대답되지 않았다. 작가는 왜 태풍 전야의 분위기를 그리고 싶었는가? 왜 영상도, 전시도, 연극도, 무용도 아닌 일종의 ‘해프닝’이어야 했나?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그것이 관(람)객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는가? 즉, 관(람)객들은 왜 30분의 시간을 내서 태풍 전야의 분위기와 불안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 어떤 ‘왜’에 대해서도 나는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런 ‘나쁜’ 의심이 들었다. 위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혹시 창작자에게 ‘현대 예술의 난해함’이라는 안전한 도피처가 있기 때문은 아닌가?

‘난해한’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 나는 관(람)객이 자신의 ‘무지’를 탓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지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의 생각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관(람)객은 작품을, 공연자를, 창작자를 사랑하고 싶어서 시간을 내어 전시장이나 공연장을 찾는다. 작품으로부터 충분히 보고 듣고 느끼지 못했다면, 그래서 마음 속에 준비해 간 사랑을 충분히 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결코 관객의 책임일 수 없다.

물론 예술 작품은 얼마든지 난해할 수 있다. 작가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언제나 모두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다만 ‘이런 예술은 원래 난해하고 애매모호한 것’이라고 ‘퉁치고’ 지나가는 순간은, (그래서 관객을 자신의 무지에 대한 회의로  몰아넣는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난해한 예술’을 애호하는 관(람)객들이 원하는 것은 말끔하게 마감된 그럴듯한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고유한 문제 의식이며, 그것을 올곧게 밀고 나가는 창조적 힘이다. 겉보기에 조금 울퉁불퉁하더라도, 혹은 다소 엉성하더라도, 그런 작품들이 폭넓은 울림을 남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착한’ 관(람)객이 되기로 한다. 마음 속의 질문에 대해 작품으로부터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나의 오감과 정신이 온전히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일 게다. <전야>에서 나는 작가가 세계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 내는 예민한 감수성을 보았고, 영상과 무대를 다루는 세련된 감각도 보았다. 다음 번에 또 다른 작품이 나온다면, 혹은 이 작품이 더욱 발전되어서 나온다면, 분명히 관심을 가지고 찾아가서 볼 것이다. 이번에는 단지 ‘전야’일 뿐이었지만, 다음번에는 ‘태풍’이길 기대하면서. ㉦


사진 출처 DVOXAC의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dvox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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